나로선 20대 초반이라 겁도 없이 말을 꺼낸 것이지만 나중엔 후회를 많이 했다.
어떻게 돈까지 많이 가지려고 합니까.지금 같으면 작가도 생활인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다.
그해 2월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도 갔다.미대 진학에 대해 부모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.나는 국가 발전에서 소외된 호남의 풍경을 마주하고 가슴이 뜨거워졌다.
집안은 부자라고 할 수 없지만 끼니 걱정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.1969년 여름 스무살 때 호남선 열차를 처음 탔던 순간이다.
중앙정보부 불려가 반공 교육도 받아1971년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이던 필자(왼쪽)가 하숙집 친구들과 찍은 사진.
이후 입대가 연기된 것을 보면 아버지의 노력이 성공한 모양이었다.이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나는 학창 시절 호남선 열차를 타보고 절실히 느꼈다.
이 일로 나는 반정부 성향이란 낙인이 찍혔다.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은 주변의 섬과 바다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고장이다.
그 자리에 있던 문인들에겐 기가 막힌 얘기였을 것이다.웬만한 공무원 월급의 열 배 정도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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